이코노믹리뷰
[이코노믹리뷰=진운용 기자] ASML,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도쿄 일렉트론, 램리서치, KLA 등 글로벌 반도체 장비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며 한국 반도체 산업도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심해지고 있다.
업계에선 적극적인 R&D(기술개발) 지원 외에도 인수합병을 위한 재무적 지원과 함께 피인수 기업 육성을 위한 ‘벤처캐피탈(VC) 활성화·국산화에서 혁신기업으로의 정부 정책 선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점유율 더 벌어져
2일 업계에 따르면 ASML,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도쿄 일렉트론, 램리서치, KLA 등 전세계 반도체 장비사 빅5의 점유율은 2011년 60%에서 2023년 70%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은 382억달러에서 1029억달러로 169% 성장했다. 반도체 산업 전체가 커짐과 동시에 첨단 공정으로 산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부 기업의 의존도가 심화된 것이다.
한국 반도체 업계도 마찬가지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 이후 소재 분야에서 한국은 상당 부분 내재화에 성공했으나, 장비의 경우 아직까지도 대외 의존도가 심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올해 발간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수출입 구조 및 글로벌 위상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2023년 반도체 장비 13개 분야에서 절반 이상 품목군이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포토 장비, 측정 장비, 이온주입 장비, 식각 장비, 테스트 장비 등의 적자 폭이 더욱 크다.
첨단 공정으로 갈수록 팹리스·파운드리·소부장 중 어느 한 분야에서만 잘 해서는 국가 경쟁력이 살아날 수 없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현재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 위주로 지나치게 치중돼 있어 팹리스와 소부장 분야를 적극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보다 어려운 소재·장비…“핵심 기술 확보 위해 M&A 해야”
소재·장비는 일반적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TV, 세탁기 등 단순 조립을 하는 소위 ‘세트’ 산업보다 원천 기술을 필요로 할뿐더러, 좀 더 기술집약적이고 기술융합적이다. 그렇기에 후발주자 입장에서 기존 기업들과의 거리를 메꾸기 위해선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격차를 빠른 시간 내에 줄이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M&A(인수합병)’가 있다.
실제 유럽과 미국의 주요 장비사들은 성장기에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핵심 기술을 확보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다.
하나의 반도체를 만드는 데엔 크게 8가지 공정이 필요하다. 그 중 포토 공정 장비를 지배한 네덜란드의 ASML은 1999년 미국 마이크로유니티 시스템스 엔지니어링의 마스크툴스(MaskTools) 사업부를 인수했다.
포토 공정은 보다 미세 회로를 그리기 위해서 ‘마스크’가 필요한데, ASML은 마스크툴스 사업부를 인수함으로써 마스크 기술 역량을 확보했다. 마스크란 일종의 ‘인쇄판’과 같은 것으로, 마스크엔 회로 패턴이 새겨져 있어 이 위로 빛을 쏘면 마스크를 통과한 빛이 웨이퍼 위에 회로 패턴을 새긴다.
마스크툴스 사업부는 레티클 설계 및 포토마스크 검증 제품을 소유하고 있었고, ASML은 마스크툴스가 보유한 OPC(광학근접보정) 기술 확보를 통해 미세 공정 기술을 강화했다. OPC는 노광 공정 시 발생하는 빛의 회절을 보완하는 작업이다.
또 ASML은 2006년 브리온테크를 인수해 컴퓨터 리소그래피 설계/제조 기술을 확보했으며, 2013년에는 사이머를 인수하기도 했다.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도 마찬가지다. 어플라이드는 콘시리엄, 올보트, 이텍, 시스템스 등 인수를 통해 기술 역량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메트론 테크놀로지와 브룩스 소프트웨어 인수를 통해 장비 솔루션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신문섭 베인앤드컴퍼니(Bain&Company) 대표파트너는 “ASML과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모두 유사한 성장 패턴을 보인다”며 “이들 기업 모두 인수합병을 통해 중요한 기술을 내재화했다”고 말했다.
반도체 전공정 장비사 A대표는 “특허를 피해 차세대 장비를 개발하는 게 어렵고, 우리나라와 유럽·일본과 기술 격차가 차이나는 만큼 M&A를 통해 기술을 확보하는 건 좋은 수단”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 반도체 장비사 B대표도 기술 확보에 M&A가 좋은 방법이라는 데 동의했다.
소자 기업과의 협력과 인재 확보를 위해서도 M&A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리노 인하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와 함께 차세대 공정 시작 단계에서부터 같이 들어가 개발하고, 고급 인력을 유인하기 위해서 M&A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방 소자 기업(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새로운 공정을 개발할 때 소재와 장비사가 함께 들어와 한 팀으로 개발을 시작한다. 여기서 연구개발에 참여하는 업체가 주로 양산에 소재와 장비를 공급하게 된다.
첨단 공정의 소자 개발은 새로운 소재와 장비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소자 기업 혼자 해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소재와 장비 기업이 함께 개발에 참여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소자 업체는 그 전까지 기술력이 증명된 몇몇 업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개발 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할 기술과 노하우를 갖고 있는 업체가 기존의 소수 업체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한국 반도체 장비사 대부분은 중소 업체로 해외 장비사에 비해 안정성과 처우가 떨어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급 인력을 유치하기 쉽지 않고, 이는 곧 개발·기술 역량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업체가 하나로 합쳐 대형화되고, 기술과 인력을 흡수해 소자의 개발단계에서부터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설명이다.
“인수할 기업이 없다”... ‘VC 활성화&국산화 지양’
핵심 기술 확보, 포트폴리오 확장, 인력 유치 등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장비사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인수합병을 한 전례가 없다.
A대표는 “M&A는 자본이 많이 들기 때문에 중소 장비사 입장에선 어려운 일”이라며 “M&A시 저금리 대출 등 정부의 지원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세한 중소 장비사들이 많은 만큼,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B대표는 “우리나라는 ‘국산화’ 위주 정책으로 인해 원천 기술을 확보한 장비사들이 없다”며 인수를 하고 싶어도 할 기업이 없다고 말했다. B대표는 “국산화를 좋게만 생각하는데, 국산화는 코스트(비용) 감소 등을 위해 외국 기업의 제품을 카피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소 장비사들과 스타트업들은 카피사라 인수 대상으로 마땅치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원천 기술을 확보한 기업들이 탄생하기 위해선 10년 이상의 연구개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고, VC(벤처캐피탈)가 활성화돼야 한다. 또 정부의 정책도 국산화 위주에서 혁신 기업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2년 대한민국 벤처투자 규모는 6조7640억원으로, 전 세계 벤처투자에서 1.3% 비중을 차지했다. 이 기간에 전 세계 GDP에서 한국 GDP의 점유율은 1.7%이다. 경제 규모에도 못 미치게 벤처투자가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에 등록된 각국별 특허 수지를 비교하면 2019년 기준 미국은 746억6900만달러, 일본은 205억8600만달러, 독일은 200억2200만달러 큰 폭의 흑자를 기록했다. 반면 한국은 22억1000만달러 적자다. 한국의 경우 반도체 소자·소재·부품·장비를 만드는 데 자국보다 타국의 특허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원천 기술 경쟁력에서 뒤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