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Weekly Biz
벤처캐피털의 방산 기업 투자 건수 '135%'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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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CNBC가 올해 산업 혁신을 주도한 스타트업 50곳을 선정한 ‘디스럽터(Disruptor) 50’을 최근 공개하자 시장은 충격에 빠졌다. 미국의 방위산업 스타트업 ‘안두릴’이 챗GPT 개발사 오픈AI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안두릴이 내놓은 인공지능(AI) 미사일 시스템, 장거리 비행 드론 등이 일으킨 지각 변동이 글로벌 AI 열풍을 이끈 챗GPT보다도 컸다는 뜻이다. CNBC는 “지난 13년 동안 방산 기업이 이 목록에 이름을 올린 건 처음”이라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군 현대화와 새로운 기회 창출을 위해 국방비 지출을 늘리겠다고 제안하면서 자금 유입이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자본이 몰리고, 첨단 제품이 개발되는 선순환 속에 방산 업계가 전성기를 맞았다는 분석이다.
시장 성장과 함께 자금 유입 흐름도 달라졌다. 과거 일부 대기업으로만 투자가 몰렸다면 최근 신기술을 앞세운 ‘스타 기업’들이 탄생하며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컨설팅사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글로벌 벤처캐피털이 방산 기업에 1000만달러(약 140억원) 이상 투자한 건수는 2019년 42건에서 지난해 99건으로 급증했다. 잠재력이 큰 신생 기업을 선호하는 벤처캐피털이 방산 기업에 투자한 사례가 5년 만에 135% 늘어난 셈이다.
지정학적 갈등 확산에 찾아온 방산 ‘황금기’
글로벌 방산 시장은 세계 곳곳에서 거세지는 지정학적 갈등과 함께 부상했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전쟁 속 군사력을 보강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유럽이 재무장에 나서면서 글로벌 국방 지출이 급증하고 있다. 스웨덴 군사 정보 연구 기관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국방비 지출은 전년보다 9.4% 늘어난 2조7180억달러에 달했다. 냉전 이후 최대 증가 폭이다. 각국의 국방 예산이 방산 기업으로 흘러들며 시장 규모는 계속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 마켓스앤드마켓스는 “세계 각국의 국방비 규모가 늘어난 가운데 (AI 기반) 자율 전투기 개발, 무인 전투 차량 도입, 군용 드론 사용 증가 등 신기술 접목이 속도를 내면서 지출은 계속 증가할 전망”이라며 “지난해 4734억달러 규모였던 방산 시장은 2029년 6821억달러까지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형 무기가 잇따라 출시되는 상황에서 각국은 군 현대화를 위해 경쟁적으로 국방비를 늘릴 수밖에 없고, 이에 방산 시장도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갈 것이란 얘기다.

방산 ‘골드러시’에 뛰어드는 신규 투자자들
혁신 기술을 내세운 스타트업이 속속 등장하며 방산 투자 건수도 빠르게 늘고 있다. 베인앤드컴퍼니는 “투자자들이 더 빠르고 저렴하고 강력한 방산 기술을 약속하는 혁신적인 스타트업을 지원해 (방산 기업) 투자 건수가 지난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며 “2018년부터 2022년까지 투자의 대부분은 우주 관련 기업에 몰렸지만 지금은 무인 해상 시스템(AI 레이더·선박 등), 자율 항공기와 같은 다양한 분야로 투자가 확대되고 있다”고 했다. 투자층도 다변화했다. 복잡한 기술에 진입 장벽을 느꼈던 일반 투자자들이 최근 방산 기업들의 주가 상승을 보며 앞다퉈 방산 ‘골드러시’에 뛰어들고 있다. 베인앤드컴퍼니는 “다양한 산업에 걸쳐 투자하는 일반 투자자까지 유입되면서 (방산 시장의) 투자 기반이 크게 넓어졌다”며 “방산 시장의 투자 대상과 투자금 출처가 함께 다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강력한 투자 심리를 보여주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혁신적 각종 방산 기술이 생겨나고 이를 뒷받침하는 투자 수요까지 더해지며 방산 시장의 기반이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전통·신흥 기업 손잡아야 지속 성장 가능”
투자금이 늘어나는 만큼 방산 업계 내 경쟁 또한 치열해지고 있다. 첨단 전투기와 미사일 등으로 시장을 장악해 온 록히드마틴·RTX(옛 레이시온테크놀로지스)와 같은 글로벌 대기업들과 AI 기술을 앞세운 안두릴 등 신흥 강자들이 맞붙는 모습이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KPMG의 피터 그리피스 방산·국가안보 글로벌 리더는 “공공 지출 확대에 더해 민간 자본까지 흘러 들어오며 시장이 급성장하는 가운데 전통 기업들과 신흥 기업들이 수주 계약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라며 “소프트웨어 역량과 첨단 제조 기술을 갖춘 중소기업들이 고품질 제품을 빠르게 제공하며 산업 생태계가 바뀌고 있다”고 최근 보고서에서 밝혔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영원한 호황’은 없는 만큼 산업 성장을 이어가기 위해 전통 기업과 신흥 강자가 손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컨설팅 기업 액센추어는 최근 보고서에서 “기존 방산 기업들은 우수한 기술 인재를 모으고 디지털 혁신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반면, 신규 기업들은 지속적인 자금 조달과 기존 기업들에 유리하게 짜인 규제에 가로막혔다”며 “두 집단이 전략적으로 협력한다면 기술 혁신을 통해 새로운 방산 수요를 창출하고, 이에 발맞춰 대규모 생산을 하는 등 서로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활용하는 성공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다”고 했다. 이동욱 베인앤드컴퍼니 파트너는 “오늘날 글로벌 방산 시장의 호황을 만들어낸 지정학적 요인과 거시적 상황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방산 기업들은 미래를 대비해 판매 국가나 고객을 다변화하고, 고객들의 개별 수요에 맞춘 투자 계획 수립 및 안정적인 수익 모델 마련 등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