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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 윤성원 베인앤드컴퍼니 대표파트너] # 미국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의 한 콘퍼런스룸. 한국 대기업에 인수된 직후 열린 첫 경영 리뷰에서는 한국 본사에서 파견된 '전략 담당자'가 회의 초반부터 분위기를 장악한다. 인수된 미국 회사의 최고경영자(CEO)와 임원진이 연간 계획을 설명하자 담당자는 서투른 영어로 말을 끊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세부 지표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회의가 끝나자 "본사에 문제점을 별도로 보고하겠다"고 못을 박는다. 현지 경영진은 자존심이 상했고, 그날 이후 이 회사의 보고는 '보고를 위한 보고'가 된다. 매출 목표는 근소하게 맞추지만 시장 감각과 조직 자생력이 급속히 약해진다.
이 장면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가상의 재구성이지만 한국 기업이 미국 등 서구권 회사를 인수한 뒤 자주 목격되는 풍경이다. 공통점은 두 가지다. 첫째 '잭팟딜' 집착이다. 한번에 판을 뒤집을 대형 거래에 마음이 쏠리면 가격·리스크·통합 난이도가 대체로 과소평가된다. 둘째 의사결정 구조의 충돌이다. 한국 기업 본사는 '오너의 정답'을 정리해 내려보내고, 이사회에는 감시 성격의 측근을 앉히는 경향이 있다. 반면 서구권 조직은 토론과 합의로 전략 방향을 정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러한 충돌은 본사 입장에선 인수 회사 이사회가 본사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이고, 현지 회사는 본사가 일방적 의사결정을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크로스보더 인수·합병(M&A)의 핵심은 홈런보다 안타다. 한번에 판을 뒤집을 대형 거래에 집착하기보다 중소 규모의 딜을 꾸준히 반복하며 학습 곡선을 쌓아가는 편이 장기 수익률도, 생존율도 높다. 유행에 휩쓸려 비싸게 사는 실수를 되풀이하기보다 경기가 식을 때 저가 매수를 실행할 수 있도록 내부 승인 절차와 리스크 기준을 평소에 손봐둬야 한다.
이를 실행으로 옮길 원칙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합리적인 이사회 운영이다. '내 사람' 대신 현지 CEO가 존중할 만한 산업 전문가를 이사회에 앉히는 것이 중요하다. 보고라인은 하나로 정해 이중 보고를 금지하고, 감시보다는 토론과 지원 중심으로 운영해야 신뢰가 쌓인다.
둘째 조직문화와 운영 룰의 연착륙이다. 누가 무엇을 결정하는지 권한 범위·성과지표·보상체계·고객 커뮤니케이션·재무·정보기술(IT) 전환 일정을 구체적 로드맵으로 고정해야 한다. 본사 담당자의 즉흥 지시보다 계획된 절차로 움직이는 것이 손실을 줄인다.
셋째 반복 가능한 M&A 체계다. 인수 목적별로 점검 항목과 통합 속도를 달리하고, 법무·재무·인사·IT·ESG를 포괄하는 상시 파이프라인과 외부 파트너 네트워크를 유지해야 한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해외 M&A에 대한 기업들의 문의가 쏟아진다. 기회를 성과로 연결 짓는 열쇠는 사전에 정의된 전략 목표와 잠재 대상 그리고 의사결정 사이클과 시장 사이클 간의 조율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는 해법은 루틴에 있다. 전문가가 이끄는 이사회, 이를 뒷받침하는 룰 세팅, 작지만 정확한 거래의 반복. 그렇게 안타를 착실히 쌓는 기업이 결국 글로벌 무대에서 조용히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