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비즈니스
코로나19 이후 지난 3년간 이어졌던 고물가와 가격 인상 중심의 성장 공식이 한계에 도달하면서 글로벌 소비재 업계의 성장 둔화세가 본격화하고 있다. 2024년 전 세계 소비재 시장(식음료, 생활용품, 개인 관리 제품 포함)의 소매 판매액은 약 7조5000억 달러로 전년 대비 7.5%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2023년의 9.3%, 2022년의 9.8%와 비교하면 성장세가 둔화된 수치다. 특히 2024년 매출 성장 가운데 약 75%는 가격 인상에 의한 것이었고 실제 판매 증가율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무르는 것으로 분석된다. 소비재 업계는 이러한 흐름을 단순한 경기 변동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선진국 소비자의 지출 감소, 신흥국 중심의 수요 재편, 기존 대형 브랜드의 정체, 그리고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 격차가 맞물리며 글로벌 소비재 기업들은 ‘소비자 중심의 재정의 (reinvention)’ 없이는 지속 성장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올해는 이 같은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될 수 있지만 전제 조건은 분명하다. 과거의 성장 모델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포트폴리오 재설계와 생산성 혁신… 위기 속에서 기회를 만든 기업들
일부 선도 기업들은 이러한 전환기에 마케팅 전략을 고도화해 반등의 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예컨대 미국 식품 기업 크래프트하인즈의 크림치즈 브랜드 ‘필라델피아’는 2024년 1~9월 동안 전년 대비 4%의 매출 성장을 기록했고 독일에서는 비어스도르프의 스킨케어 브랜드 ‘니베아’가 상반 기에만 9%의 유기적 매출 성장을 달성했다. 두 사례 모두 데이터 기반 마케팅, 소비자 세분화 전략, 채널 다각화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고정된 시장 내에서도 성장을 기록한 사례로 꼽힌다. 베인 분석에 따르면 소비재 업계는 더 정교한 마케팅 수단을 활용해 매출은 3~5%포인트, 영업마진은 2~3%포인트 끌어올릴 여지가 있다.
일부 기업은 기존 포트폴리오의 범위를 확장하거나 새로운 수익 풀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정체된 시장 구조를 돌파하고 있다. 반려 동물 식품으로 잘 알려진 마즈는 반려동물 의료 및 서비스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기존 브랜드 파워를 기반으로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다. 맥주 유통 대기업 AB인베브는 자사의 광범위한 유통 인프라를 활용해 기업 간 거래(B2B) 기반의 새로운 수익 모델을 구축했다. 이처럼 전통적 범주를 넘는 수직 확장과 네트워크 기반 사업 전환이 성과를 내고 있다. 생산성 향상도 필수 과제다. 베인 분석에 따르면 제품 구성 (SKUs)의 복잡성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연간 매출 성장률을 2~5%포인트, 마진을 1~4%포인트 끌어올릴 여지가 있다. 특히 소비자 가치와 무관한 제품 복잡성, 공급망 비효율, 불필요한 비용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AI)을 통해 이를 자동화하고 최적화하면 성장과 수익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제품 이미지. 사진=크래프트하인즈 웹사이트
기술 격차가 성과 격차로… AI 도입 더딘 기업의 수익률 악화
소비재 기업의 수익성 악화는 단순한 시장 변수 때문만은 아니다. 디지털 기술, 특히 생성형 AI 대응 속도가 늦어질수록 기업의 투자 실적도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글로벌 상위 소비재 기업의 최근 5년간 연평균 총주주수익률(TSR)은 6%에 그쳤는데, 이는 직전 5년(14%)에 비해 절반 이하로 낮아진 수치다. 같은 기간 기술·헬스케어·유통 산업군은 평균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소비재 업계를 크게 앞섰다. 최근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헬스케어, 유통 등 타 산업의 경영진 중 84% 가 AI를 최우선 전략 과제로 인식하고 있지만 소비재 기업에서는 이 비중이 37%에 불과했다. AI 활용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한 소비재 임원은 90%에 달했지만 실제로 AI를 통해 구체적인 비즈니스 가치를 창출할 계획을 수립한 기업은 6%에 그쳤다. 이처럼 기술 채택이 늦어지는 동안 소비자 행동은 빠르게 디지털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AI 기반의 자동 식단 추천, 쇼핑 어시스턴트, 음성 기반 검색이 일반화되면서 브랜드가 소비자 선택 과정에서 배제되는 ‘탈중개(disintermediation)’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브랜드가 과거처럼 광고만으로 인지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이 같은 흐름에 대응하려면 단순히 기술을 도입하는 차원을 넘어 소비 자와의 접점을 강화하고 구매 여정 전반에 걸쳐 브랜드 존재감을 확보해야 한다.
고물가 탈피 이후의 세계… 구조적 성장 둔화의 현실
소비재 산업이 직면한 성장 둔화는 단기적 위기가 아니라 구조적인 현실이다. 가격 인상의 효과는 한계에 봉착했고 물량 중심의 성장은 여전히 정체 상태다. 실제로 글로벌 전체 소비재 매출 증가율은 2022년 9.8%, 2023년 9.3%에서 2024년 7.5%(예상치)로 지속 하락하고 있으며 물량 증가율은 2024년 기준 1.7%에 그쳤다. 미국, 유럽연합(EU) 등 선진국 시장의 성장률은 2023년 7.7%에서 2024년 4.5% 로 급감했고 대부분 성장은 신흥국에 의해 견인됐다. 특히 미국 소비자들은 구매 시 가성비를 우선시하며 소비의 초점은 ‘대중 브랜드’와 ‘가치제품군’에서 ‘프리미엄 제품’과 ‘PB 브랜드’로 옮겨가는 추세다. 2021~2024년 프리미엄과 PB는 각각 시장점유율이 0.8%포인트씩 올랐으나 반대로 대중 브랜드는 0.7%포인트, 가치 브랜드는 0.9%포인트 하락했다. 소비 행태가 양극화되고 있으며 브랜드 충성도보다는 실질적 가치에 기반한 소비가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신흥국 시장은 그나마 이러한 지각 변동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다. 브라질,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두 자릿수 매출 성장을 기록했으며 이들 지역의 물량 성장률은 3%에 달했다. 이는 글로벌 전체 물량 증가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중국은 온라인 가격 경쟁과 소비 위축으로 디플레이션 압력이 지속됐고 인도는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 성장을 기록했다. 신흥국마저 확실한 성장 축으로 자리 잡지 못할 경우 소비재 산업 전반의 불확실성은 더 커질 수 있다.
소비재 기업이 고려해야 할 네 가지 전략적 선택
올해는 소비재 기업들이 미래를 위해 전략을 재정비할 수 있는 결정적 해다. 이를 위해 기업은 단편적 대응을 넘어 전방위적 리인벤션에 나서야 한다. 필자가 제시하는 리인벤션의 방향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현 재 포트폴리오 내 수익 풀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소비자 데이터를 정교하게 분석하고, 마케팅·영업 실행에서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기술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 둘째, 기존의 범주를 뛰어넘는 혁신을 통해 정체된 시장을 돌파해야 한다. 카테고리 확장, 수직 통합, 인수합병(M&A) 등 전략적 수단을 활용해 새로운 성장 공간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 셋째, AI를 포함한 디지털 기술을 운영 전반에 통합해야 한다. 단기적인 자동화만이 아니라 ERP, 콘텐츠 생산, 수요 예측, 재고 최적화 등 전 과정에 기술을 내재화 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기업의 중심을 다시 소비자에게 둬야 한다. 하이퍼 맞춤형 마케팅, 옴니채널 접점 확대, 신흥 시장의 현지화 전략 등을 통해 브랜드의 소비자 밀착도를 높이는 것이 결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