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매경이코노미=손현덕, 이윤재, 최근도 기자] "'ABCDE 산업' 육성으로 한국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자."
매일경제신문이 한국 청년들에게 희망이 될 미래 유망 산업을 진단하는 좌담회에서 이 같은 제언이 나왔다. 현재 대선이 약 8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한국의 성장동력을 제시하는 대선 주자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매일경제는 지난 22일 국내 산업 전문가들과 함께 청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산업에 대해 논의하는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에는 송재용 서울대 경영대 교수, 정지택 베인앤드컴퍼니 서울사무소 대표, 주형환 세종대 석좌교수(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김희집 에너아이디어 대표가 참여했다. 이들이 대한민국 청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산업으로 'ABCDE'를 제시했다. ABCDE란 우주항공(Aerospace)·바이오(Biotech)·문화(Culture)·디지털(Digital)·에너지(Energy)다. 이들은 핵심 산업의 조건으로 유망성, 경쟁력, 시장 규모, 개인의 꿈 등을 꼽았다.
좌담회 진행은 손현덕 매일경제신문 주필이 맡았다.
― 우주 산업은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분야다. 한국은 경쟁력이 충분한가.
▷정지택 대표=우주 산업은 모빌리티의 핵심이다. 주력 산업으로 키우려면 경쟁력 여부가 중요하지만, 그렇다면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에 주력 산업으로 하지 않아야 하는가 의문도 생긴다. 우주 산업은 '청년들의 꿈'이라는 차원에서 니즈가 높다. 경쟁력이 없다고 안 할 산업은 아니다.
▷주형환 교수=최근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가 자신이 창업한 '블루오리진'을 통해 우주에 가는 모습을 보면서 15세기 대항해 시대가 다시 시작됐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으로 굉장히 큰 산업이 열렸다. 한국은 우주 산업 미개척자이지만, 연관 산업인 반도체·센서·배터리 등은 세계 톱티어다. 한국의 '비빔밥' '빨리빨리' 문화로 잘 융합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 다만 현재 대기업 가운데 우주 산업에 집중하고 있는 곳이 보이지 않는 점이 약점이다.
―바이오 분야는 미국·유럽 같은 국가에 비해 늦었다는 우려도 있다.
▷송재용 교수=바이오헬스케어는 9000조원 시장 규모로 세계 최대 산업이 됐다. 한국은 정밀제조에 강점이 있는 만큼 의약품 위탁생산(CMO), 위탁개발생산(CDMO)에서 경쟁력이 높다. 이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모더나 백신 CMO라는 결과를 낳았다.
▷주형환 교수=바이오는 전후방 효과와 고용 효과가 크다. 바이오헬스 산업의 고용유발계수는 16.9명(10억원당)으로 전 산업 평균(8.8명)보다 약 2배 높아 고용창출 효과가 크다.
▷정지택 대표=대만의 TSMC가 요즘 대세다. 한국의 뛰어난 제조업과 정보기술(IT) 역량을 결합해 '바이오의 TSMC'를 만들어야 한다.
―전 세계 빅파마(대형 제약사) 간 경쟁이 치열하다. 한국에서 '빅파마'가 나올 수 있을까.
▷송재용 교수=개인적으론 한국에서 빅파마가 등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글로벌 빅파마는 현실적으로 인수·합병(M&A)도 만만치 않다. 이보다는 혁신 기술로 바이오 산업을 키우는 편이 낫다. 취사선택을 잘해야 한다.
▷정지택 대표=처음부터 '빅파마를 만들자'는 목표를 세우는 건 비현실적이다. 바이오 산업으로 시작해 글로벌 빅파마로 성장한 암젠의 길을 가는 게 어떨까. 그래서 바이오의 TSMC가 되자는 것이다. 우리도 CMO·CDMO에서 빅파마로 올라설 가능성이 충분하다.
―한국 청년들의 꿈·미래 측면에서 문화 산업이 주목받고 있다. 영화·음악뿐 아니라 웹툰·웹소설·게임까지 활약하고 있다.
▷정지택 대표=문화·콘텐츠 산업이 발전하려면 자본, 재능, 생태계가 잘 어우러져야 하는데 한국은 이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한국 Z세대가 세계 시장을 이끌어가기 굉장히 좋은 분야다. 방탄소년단(BTS) 소속사인 하이브가 미국 유명 매니지먼트사 이타카홀딩스를 인수한 게 그 예다.
―디지털은 빅데이터·인공지능(AI) 같은 소프트웨어부터 반도체 같은 하드웨어까지 범위가 넓다. 한국은 어디에 집중해야 하나.
▷송재용 교수=반도체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의 꽃이다. 우리가 잘하는 메모리 반도체를 계속 잘해야 한다. 비메모리 반도체에서는 파운드리 사업이 중요하다. 파운드리는 정밀제조에 강점이 있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다.
▷주형환 교수=청년들이 좋아하는 산업에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디지털·IT 산업은 다양한 도메인에 접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 융합, 규모의 경제라는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배터리·수소 등 친환경 에너지 분야에 한국 기업이 많이 뛰어들고 있다.
▷김희집 대표=석유로 대표되는 에너지 산업이 신재생에너지로 진입하면서 인류는 100년 만에 거대한 변화를 맞고 있다. 한국은 2019년 에너지 수입에만 145조원 이상을 썼다. 현재 한국이 부족한 건 국가 주도 프로젝트다. 한국은 지난 15년간 풍력발전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았다. 변화가 필요하다.
▷주형환 교수=중국과의 가격경쟁력 측면에선 쉽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태양광발전을 예를 들면 폴리실리콘부터 패널까지 모두 중국을 이겨내기 어렵다. 수익성을 생각할 때 굉장히 잘 분석해서 접근해야 한다.
―친환경, 에너지 독립 측면에서 원자력을 빼놓을 수 없다. 소형모듈원자로(SMR) 등이 미래 산업이 될 수 있나.
▷김희집 대표=자연스럽게 시장에 맡겨도 기존의 대형 원전은 출력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유연성이 부족하고 주민들 민원도 많아서 줄어들 수밖에 없다. SMR나 중소형 원자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게 탈탄소, 에너지 독립에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런데 지금 너무 정치화돼 아쉽다. 과거 우리가 풍력발전에서 상실한 기회가 원전에도 반복될까 우려된다.
▷주형환 교수=글로벌 정치 측면에서 원자력 문제를 바라볼 필요도 있다. 세계적으로 원전 건설에서 우리 경쟁자는 중국과 러시아밖에 없다. 사실상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에서 원전을 짓는 건 한국뿐인 셈이다. 원전 생태계를 유지하면서 SMR 등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4人의 정책 제언 / "기업이 하겠다는 게 미래 동력…정부 규제 풀고 전폭 지원해야"
[매일경제=이윤재 기자] "지금 기업들이 하겠다는 것이 바로 우리 먹거리다. 정부는 이들이 하려는 것을 잘 뒷받침하면 된다."
이날 좌담회에 참석한 토론자들은 정부 규제 개선에 대한 주문을 쏟아냈다. 주형환 석좌교수는 "공급을 제약하는 규제는 풀고 수요를 창출하는 제도는 적시에 만들어줘야 한다"며 "핵심 산업은 일종의 공공재라는 생각으로 과감한 지원이 필수"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최소한 미국이 반도체에 지원하겠다는 수준 이상의 세제·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재용 교수 역시 "4차 산업혁명 시대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해 규제 정책의 대전환이 시급하다"며 "한국은 각종 칸막이 규제로 산업의 융·복합화나 빅데이터 활용을 통한 비즈니스 모델 혁신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미국 등 선진국처럼 새로 부상하는 사업 영역에서만이라도 네거티브 규제로 신속히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 개혁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주 석좌교수는 "반도체, 바이오 관련 대학 정원을 한시적으로 늘려 우수 인력을 배출해야 한다"며 "우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민관 합동 장학금을 조성해 해외 대학·대학원에서 유학한 후 이들을 다시 유입시키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국내 에너지 정책 결정에 있어서 정치 논리 배제도 급선무로 지적됐다.
김희집 대표는 "에너지전문가로 구성된 국가 에너지 위원회를 만들어 중장기적 관점에서 에너지 정책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배터리 산업에서 핵심인 광물자원도 정부가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지택 대표는 "유망 산업을 제대로 키우려면 청년들의 니즈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젊은 세대가 좋아하면서 이들에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다"며 "정부의 톱다운 방식 육성에서 벗어나 해당 산업의 성공·순환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자리 잡는 게 우선"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