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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김기정 기자] ◆ 매경 포커스 ◆
롯데백화점의 캐시미어 니트는 백화점 창립 40주년 기념상품으로 내놓을 만큼 품질과 가격이 뛰어났다. 하지만 자사 온라인 쇼핑몰인 '롯데ON'보다 '쿠팡'에서 더 싸게 팔았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연간 1조원씩 적자 내는 기업(쿠팡)과는 경쟁하지 않겠다"고 자신감을 보였지만 정작 실무에선 그룹의 종합적인 전략보다는 당장 연말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기 실적'을 챙겼다.
신세계그룹 SSG닷컴에서 주문하면 다음날 '품절'이라고 연락이 오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다. 오늘 밤 주문하면 다음날 새벽에 물건을 받는 시대에 SSG닷컴은 다음날에서야 '재고 없음' 메시지를 받게 된다. 오프라인 백화점은 직매입하지 않아 온라인 재고관리도 각 입점업체가 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이런 소비자들의 온라인 구매 경험치가 모아져 유통 대기업 롯데의 온라인 쇼핑몰 '롯데ON'과 신세계의 'SSG닷컴'은 그룹의 아픈 손가락이 되고 있다.
쿠팡이 대규모 적자를 무릅쓰고 실천한 '소비자 중심주의'가 기존 유통업체의 비즈니스 모델들을 뿌리째 흔들었다. 하지만 '가격 경쟁력' '빠른 배송'을 무기로 삼은 쿠팡 역시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 주문 후 다음날 새벽배송, 직매입에 따른 재고관리, 편리한 반품시스템 등 소비자들의 불편한 경험을 해소하는 데는 여전히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쿠팡의 시가총액(32조원)은 이마트 시가총액(2조7000억원)과 롯데쇼핑 시가총액 (2조6000억원)을 합친 것에 6배에 달한다. 쿠팡의 시장점유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란 기대감이 선반영돼 있다는 게 증권가의 분석이다.
쿠팡의 경쟁 상대는 네이버, 카카오가 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네이버는 CJ대한통운과 손잡고 물류 고도화를 통해 '배송 전쟁'에 뛰어들었다. 카카오도 '선물하기'로 유통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존 모델을 따라 하는 쿠팡이 유통 외에 다른 사업에서 뚜렷한 성과를 냈다는 소식도 아직은 들리지 않고 있다. 실제 아마존은 유통이 아닌 클라우드와 같은 아마존웹서비스(AWS)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회사다.
또 다른 유통 대기업인 현대백화점그룹은 사업 다각화와 함께 면세점 사업에 진출했지만 코로나19 등으로 주 고객인 중국인이 방한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상 소비재 부문에서 대형마트 매출을 추월한 편의점 업계에선 GS25와 CU가 '규모의 경제'를 이루며 양강 구도를 형성한 가운데 롯데의 세븐일레븐은 미니스톱을 인수하며 3강 구도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코로나를 경험하며 유통업계의 판도가 크게 바뀐 가운데 최고경영자(CEO)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해 기대와 함께 경제위기라는 악재 속에 내년 전략을 짜야 하는 상황이다.
소비재 기업들의 컨설팅을 담당하는 강지철 베인앤드컴퍼니 파트너, 박춘남 닐슨아이큐코리아 전무, 심현보 모니터딜로이트 부문장(가나다순)으로부터 현 소비재시장의 상황을 진단해보고 미래 전략을 들어봤다.
심현보 모니터딜로이트 부문장은 유통업이 역사적으로 세 번의 큰 변화를 겪었다고 설명했다. 심 부문장은 "프랑스 파리에 처음으로 백화점이 생기면서 물건을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전달하는 데 가치가 창출되고 '유통'이라는 개별 '산업'이 만들어지게 됐다"면서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고르는 자체가 소비자들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유통혁명은 월마트가 가져온 글로벌 공급망 혁신이다. 전 세계에서 가져온 물건을 대량으로 싸게 소비자에게 제공했다. 다음은 아마존 형태의 인터넷 또는 모바일 혁명이 가져온 디지털 유통의 등장이다.
한국도 백화점-대형마트-전자상거래의 유사한 경험을 거쳤다. 강지철 베인앤드컴퍼니 파트너는 "백화점, 대형마트도 한국 시장에 처음 등장할 때는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이어 전자상거래는 '최저가'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소구점이 있었고 최근엔 쿠팡이 주도하는 '빠른 배송'으로 소구점이 넘어갔다"고 분석했다. 이제 소비자들은 '빠른 배송'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럼 쿠팡 다음의 유통 모델은 무엇일까.
심 부문장은 "어려운 자영업자가 많지만 골프장은 예약이 안 될 정도로 수요가 몰린다"면서 "경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결국 중간이 없기 때문에 유통업체들이 보다 선명하게 포지셔닝을 하지 않으면 힘들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명품 브랜드처럼 제품 특유의 가치를 전달하거나, 아니면 공간에 투자하는 백화점처럼 고객에게 물건을 고르는 기쁨을 주든지, 코스트코처럼 제품 가격을 싸게 하고 품목을 단순화해 선택의 고통을 줄이는 것과 같은 확실한 소구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일반 대형 매장의 제품 수(SKU)가 10만~20만개에 달하는 반면 코스트코는 제품 수를 3000개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오프라인 대기업 유통회사들이 전자상거래 시장에 진입하면서 이런 선명한 포지셔닝 전략이 없었던 것이 패착으로 꼽힌다.
박춘남 닐슨아이큐코리아 전무도 "패션 전문몰처럼 카테고리별로 취향성이 있는 전자상거래 업체들이 주목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소비자들의 취향소비가 강화되면서 이제는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포지셔닝 전략이 필수적이라는 게 소비재 컨설턴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예를 들어, 디지털유통이 없던 시절 이마트의 고객은 '전 국민'이었다. 하지만 전자상거래의 공습과 함께 오프라인 유통업체들도 백화점, 마트, 편의점, 할인점 등 업태별로 포지셔닝을 좀 더 명확히 가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강 파트너는 "오프라인 유통도 전 국민을 타깃으로 하는 '매스 유통'이 아니라 특정 고객층을 타깃으로 해야 한다"면서 "고객들이 '와우'라고 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코스트코가 다시 등장한다. 코스트코의 회원료는 전체 매출의 2% 수준이다. 회원료 외에 남는 이익은 고객에게 환원하고 그 가치를 고객들이 경험하는 전략이다. 코스트코가 디지털 시대에도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했던 이유다. 강 파트너는 "코스트코는 고객에게 전달하는 가치가 명확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한국 오프라인 매장들이 코스트코 모델을 적용할 수 있을까. 한국의 경우 여전히 순환보직이 보편적이며 조직의 경직성도 높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강 파트너는 "코스트코의 와인 바이어는 와인만 20~30년을 담당한다"면서 "코스트코 직원 1명의 급여는 높지만 조직을 슬림화해 인건비 부담을 줄였다"고 설명했다.
박 전무는 "엔데믹과 함께 오랜만에 대형마트를 방문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대형마트는 기존 손님 관리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유통업체들이 온라인 대응에 신경 쓰느라 오프라인 현장 관리가 소홀했다. 소비자가 다시 오프라인 매장을 찾게 하려면 진열, 결품관리와 같은 매장 운영의 기본을 살피고 상품 카테고리의 역할과 목적에 맞는 똘똘한 행사 기획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온·오프라인 경계도 없어졌지만 오프라인 간 경계도 없어졌다. 다이소에서 스낵, 음료를 판다. 올리브영에서 건강기능식이 잘 팔린다. 올리브영의 히트 상품 '약과'는 없어 못 팔 정도다. 특히 편의점은 오프라인 소비채널로 빠르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박 전무는 "박재범 원소주, 연세우유 크림빵 등 편의점에서 히트 상품이 많이 나왔다"면서 "편의점은 20·30대인 MZ세대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바로바로 따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MZ세대에 의존하기보다는 X세대가 마트에 왔을 때 지갑을 열게 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박 전무는 "닐슨아이큐코리아는 '수치'로 말하는 컨설팅회사다. 150개 카테고리의 소비재 품목을 추적한다"면서 "데이터를 보면 MZ세대의 실제 소비액은 크지 않다. 오히려 40대 후반에서 50대까지 X세대의 소비가 가장 크다. 그들이 마트에 왔을 때 물건을 사게 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자상거래에 대한 자본시장의 관심이 '성장'에서 '수익성'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강 파트너는 "이미 디지털 유통의 시장점유율이 전체 유통시장의 40%를 돌파했다"면서 "언제까지 계속 '성장'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본시장의 관심은 최근 5년간은 디지털 유통의 '성장'에 포커스가 있었지만 이제는 '지속가능성'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
강 파트너는 "쿠팡은 영업이익이 흑자로 돌아서면서 자본시장에 '화답'한 측면이 있는 반면 '성장'만 추구했던 다른 이커머스들의 경우 자본시장에서 수익성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다.
심 부문장도 "벤처캐피털의 입장에선 '상장(IPO)'을 위해 성장이 우선이었지만 이제 그런 시대가 지나가는 느낌"이라면서 "성장모델에 초점을 두었던 위워크가 아주 극단적으로 안 좋았던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신선식품 위주의 온라인 새벽배송을 하는 오아시스는 합리적이고 친환경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콘셉트로 급격한 성장보다는 초기부터 수익성에 집중했다"면서 "오아시스 같은 업체들이 오히려 시장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햇반'을 놓고 CJ제일제당과 쿠팡이 힘겨루기를 하면서 제조사가 유통채널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바로 판매하는 D2C모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D2C모델은 성공 사례가 많지 않다. 특히 식품의 경우 '가격' 차별화만으로는 유통사에 이기기 어렵다. 소비자들은 한 식품만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여러 식품을 함께 구매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이키의 성공 사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나이키는 D2C 판매가 2021년 기준 40%였는데 지금 60%까지 올리겠다는 목표다. 나이키는 '나이키 런 클럽'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노력했다. 그 앱의 이용자가 3억명이다. 강 파트너는 "커뮤니티 멤버에게만 한정판 제품을 판매하는 등 차별화에 나서면서 고객의 참여를 높였다"고 말했다.
그동안 유통·식품업체들이 해왔던 '단순 적립형' 멤버십으론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부족하다는 게 강 파트너의 생각이다. 그는 "커뮤니티 베이스로 진화하려면 멤버십 안에서 다양한 경험과 행위가 일어나야 한다"면서 "참여 활동에 따른 크레디트도 줘야 하고 고객들이 회사와 함께 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종의 '팬덤' 모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대형 유통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PB상품의 비중이 낮은 것도 특징이다. 닐슨아이큐코리아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9월 기준 PB상품 비중이 세계 평균 19%인 데 반해 한국은 3%에 불과하다. 프랑스는 32%, 스위스는 52%나 된다. 한국은 식품 쪽 PB상품에 대한 저항성이 크다.
박 전무는 "2022년 인플레이션 영향으로 PB상품이 전년 대비 10% 정도 성장했다. 이러한 모멘텀을 이어가기 위해 PB도 유통사의 마진 확보를 위한 구색이 아니라 브랜드로서의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제품의 포지셔닝도 강조했다. 식품군에서 밀가루, 양념류 같은 식자재는 저렴하게 가야 한다. 하지만 주류, 음료, 건강 관련 등 소득이 줄어도, 가격이 올라도 포기하지 못하는 취향소비 상품은 다르다. 제품에 따라 어떤 유통채널에서 히트시켜야 할지도 선택해야 한다. 한 상품으로 전 채널에서 히트시키는 건 어렵다. 그동안 유통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그만큼 유통업은 지역색이 강했다. 유일한 예외가 '코스트코'이지만 코스트코는 상품을 팔아 이득을 남긴다기보다는 회비로 운영되기 때문에 비즈니스 모델 관점에서 '조합'에 가깝다는 게 심 부문장의 평가다. 심 부문장은 "서울, 도쿄, 뉴욕, 런던, 시드니 등 글로벌 주요 도시의 거리 모습이 비슷해지기 시작했다"면서 "라이프스타일 측면에서 글로벌 도시의 동질화는 유통업의 해외 진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