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Close-up] 베인앤컴퍼니 글로벌 회장 - 경영 닥터 매니 마케다
- 이제는 '포스트 세계화' 시대
무역전쟁 등 정치가 세계 단절시켜 재료 싸게 받아 물건 비싸게 파는 건 끝
[조선일보=윤형준기자] "정치가 세계를 덜 글로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젠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공급·판매·인재채용·서비스 등 전 부문에서 새 전략을 짜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최근 방한한 매니 마케다(56) 베인앤컴퍼니 글로벌 회장은 22일 본지와 단독 인터뷰에서 "보호무역주의, 자국 제일주의 때문에 글로벌 밸류체인 흐름이 틀어졌다"면서 "한때 일시적인 문제라고 치부했지만 결국 세계경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 세계 60개국에 지사를 둔 베인앤컴퍼니는 맥킨지, 보스턴컨설팅그룹(BCG)과 함께 '세계 3대 컨설팅 회사'로 꼽힌다. 필리핀계 미국인인 그는 일리노이 공대, MIT 슬론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1988년 베인앤컴퍼니에 입사했다. 아시아·태평양 회장을 지냈고, 지난해 베인앤컴퍼니 사상 첫 아시아계 글로벌 회장에 올랐다.
지난 수십 년간 기업은 자유무역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가격은 가장 저렴하고 품질은 뛰어난 재료를 공급받았고, 이를 수익이 가장 많이 나는 시장에 팔 수 있었다. 그러나 미·중 무역 전쟁, 한·일 경제 갈등 등의 이유로 자유무역이 제한되면서 이런 당연한 기업 경영 논리가 무너졌다. 마케다 회장은 "베인앤컴퍼니를 경영하는 입장에서도 직원을 뽑을 때 미국 시민권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살펴야 하고, 중동 고객에 서비스를 제공할 때 다른 국가에서 일하는 직원을 보내도 될지 확신할 수 없게 됐다"면서 "아주 사소한 사례지만, 이런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마케다 회장은 "무역전쟁이 계속되든 아니든 이제 기업은 생산 기지, 타깃 시장 등의 사업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예전보다 덜 세계화된 '포스트-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가 단절시킨 세계
정치가 세계를 단절시킨 상황에서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베인앤컴퍼니는 '디지털 전환 혁신'을 필수 전략 중 하나로 꼽았다. 제조 방법, 유통 및 판매뿐 아니라 기업의 의사 결정, 공급망 관리 등에도 빅데이터, 로봇,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신기술을 접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기업처럼 자동화·대량생산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누리면서, 동시에 스타트업처럼 빠르고 민첩하게 대응하고 움직일 수 있다. 또 정치 리스크에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고, 잦은 혁신을 통해 크게 성장할 수 있다.
베인앤컴퍼니는 미국 아마존이나 넷플릭스, 중국 알리바바 등 디지털 전환 혁신에 성공한 기업을 '반역적 대기업(Scale Insurgent)'이라고 부른다〈그래픽 참조〉. 마케다 회장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은 비(非)연속성을 갖고 있다"며 "사업의 기본 전제를 깨고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이 나온 뒤, 기존 휴대전화가 전부 사라지듯 기술이 파괴적 속도로 발전하며 산업의 틀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금융·유통업이 온라인화됐고, 제조업에도 100% 자동화된 스마트 공장이 도입되는 추세다. 로봇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들 듯 서비스업도 변화가 시작됐다. 마케다 회장은 "1930년대 이후 변화가 거의 없던 자동차산업도 최근 기본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면서 "사람 대신 AI가 운전하고, 차를 사기보단 빌려 타고, 딜러 대신 온라인으로 자동차를 주문하는 시대가 온다"고 했다.
그는 "현대차뿐 아니라 모든 자동차 업체가 미래 자동차 소비 방식에 맞게 생산 인력과 설비를 조정하고, 새 시장을 발굴해야 한다"면서 "테슬라는 전기차 업체가 아니라 배터리 기술력을 가진 소프트웨어 회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케다 회장은 "모든 것이 뒤바뀌는 시대지만 딱 한 가지 바뀌지 않는 원칙이 있다"면서 "고객이 제품을 평가하고, 기업은 고객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끝장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관료조직, 경직된 노동… 혁신의 적
마케다 회장은 산업계 전 영역에 발을 걸친 한국식 대기업도 디지털 혁신 전환을 미룰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혁신 저해 요소들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특징이 있다"며 "규모가 클수록 쉽지 않지만 안 할 수는 없다"고 했다. 혁신의 적으로 피라미드식 위계질서에 기반을 둔 기업 내 관료 조직, 노동성을 경직시키는 노동조합, 단기 수익만 좇는 투자자 등을 꼽았다. 임기 동안 실적만으로 경영자를 평가하고, 오너가 감옥에 가면 모든 의사 결정이 멈춰버리는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마케다 회장은 한국 대기업이 택할 수 있는 혁신 모델 중 하나로 '에코시스템', 즉 대기업의 비즈니스 생태계 구성을 제시했다. 예컨대 아마존은 인터넷 쇼핑몰(아마존)과 서버(아마존웹서비스), 오프라인 유통체인(홀푸즈) 등을 운영하며, 이 플랫폼에서 여러 중소기업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베인앤컴퍼니 추산에 따르면, 아마존 생태계에서 지난해 수천만개 기업들이 4010억달러(약 486조원)의 거래를 했다. 마케다 회장은 "아마존은 다양한 자회사를 가진 기업 집단으로 아마존을 이용하는 개인·법인 고객에 여러 분야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서 "많은 사업을 내재화하고 있는 한국 대기업들도 이 같은 생태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