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이코노미
[매일경제=안지수 베인앤드컴퍼니 파트너] 역대급 호황을 누리던 사모펀드(PE) 시장이 변곡점에 섰다. 지난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PE 시장 투자 규모는 1980억달러(약 260조원)를 기록했다. 2021년 3540억달러(약 463조원) 대비 절반 가까이 급감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직후인 2020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중앙은행의 급격한 금리 인상, 소비 심리 저하, 경기 침체, 지정학 위기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겹친 결과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중국의 투자 규모가 전년 대비 53% 줄어 감소폭이 제일 컸다. 동남아시아(-52%), 인도(-25%), 한국(-39%), 일본(-28%)도 투자 규모가 큰 폭으로 줄었다. ‘투자 열기(exuberance)’와 ‘자금 초과잉(superabundance)’이라 표현해도 과하지 않았던 거시 환경의 격변을 그 어떤 국가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특히 주식 시장과 IPO 시장이 얼어붙는 바람에 사모펀드의 수익성을 가늠하는 ‘엑시트(exit)’ 규모가 급감해버렸다. 주요국 중에서는 일본(-73%)과 한국(-66%)이 전년 대비 감소폭이 가장 컸다. 시장 열기가 식으며 투자자 초점은 ‘고도 성장’에서 ‘비용 효율’로 옮겨 가고 있다. 공격적인 투자보다는 경기 방어형 투자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베인이 주요 투자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GP(투자운용사) 54%가 향후 5년간 수익률에 영향을 미칠 요인으로 ‘비용 효율’을 꼽았다. 2년 전보다 응답률이 2배 높다. 단순히 투자 성향이 변한 것만이 아니다. 이 설문조사에서 GP의 46%는 올해 투자 기업에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답했다. 2년 전 설문조사에서 27%만이 GP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투자자의 경영 참여가 더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류 변화 속에서 아태 지역 사모펀드 시장은 대기업 사업 포트폴리오 구조 개편이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히타치(日立)가 물류 회사인 히타치물류를 미국계 사모펀드인 KKR에 매각한 거래와 올림푸스가 현미경 제조 자회사인 에비덴트그룹을 베인캐피털에 매각한 내용이 화제였다. 한국 또한 지난해 SK그룹이 SKC 필름사업부를 한앤컴퍼니에 매각한 것이 투자업계 주목을 받았다.
올해도 사모펀드업계는 대기업 사업 포트폴리오 구조 개편을 눈여겨보고 있다. 상당수 대기업이 경기 침체에 대비해 자회사, 계열사 등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기업 상당수는 해외 진출 과정에서 M&A를 주된 경영 수단으로 여기고 있어 사모펀드 역할이 더 커졌다. 대기업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필요한 포트폴리오 매입·정리도 PE 시장이 주목하는 분야다. 투자업계가 느끼는 불확실성과 거시 환경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통계 수치 중 하나는 ‘드라이 파우더(dry powder)’라 불리는 대기 투자금이다. 지난해 역대 최고인 6760억달러를 기록했다. 2021년의 5640억달러보다도 20% 늘어났다. 지난 몇 년간 사모펀드 시장에 공격적으로 자금이 몰리며 덩치는 불어났는데, 투자 집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당분간 거시 경제의 ‘순풍’에 기댄 투자와 가치 증대는 어려워졌다. 비용 효율화, 핵심 사업 집중으로 진정한 가치를 창출해야 한발 앞서갈 수 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05호 (2023.04.19~2023.04.25일자) 기사입니다]